8기 안산노동대학 ‘세계의 노동을 만나다‘ 개강
10강 <전태일 50년을 돌아본다>
8기 안산노동대학 10강에는 내외빈 등 총 49명의 수강생이 참석했습니다. 10강은 이숙희 전태일재단 교육위원장님의 <전태일 50년을 돌아본다>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강의는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열사의 생애와 의의, 청계피복 노동조합의 역사로 진행했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 열사는 소년 가장으로서 12살부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 손수레뒤밀이, 우산팔이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시다로 평화시장 청계피복 현장에서 일을 시작해, 1년도 안돼 미싱사로 일하게 됐습니다.
평화시장 청계피복 현장에서 시다란 견습공을 의미했습니다. 사장이 재단사와 재단보조에게 일감을 주고, 이 일감이 미싱사, 미싱보조, 시다에게로 내려왔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체의 80~90%는 여성이었고, 재단사와 재단보조는 주로 남성이었습니다. 미싱사의 월 급여는 7,000원이었지만 시다는 3,000원으로 일당으로 따지면 50~70원 내외였습니다. 그 당시 출퇴근비용이 50~70원이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어린 시다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것을 봐왔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재단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단사가 되기위해 급여를 삭감하면서까지 미싱사에서 재단보조가 됐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거나, 모범업체 운영을 위해 투자자를 모으거나, 실태조사 결과를 들고 노동청을 찾아가거나, 바보회와 삼동회 등 조직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해왔지만 효과는 미약했습니다. 그러던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혔습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10년 동안의 의식변화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소선 열사와 전태일 열사와 함께했던 노동자들은 평화시장에 전태일 정신을 잇기위한 활동들을 해나갔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위해 평화교실, 노동교실, 노동교실 농성투쟁, 소모임활동, 퇴직금 투쟁 등을 이어나갔습니다. 아직 전태일 정신은 유효하다고 말했고, 평화시장 노동자 역사를 설명하면서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시혜적 시선이 아닌 연대적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아니고, 너가 아니고,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며 강의를 마쳤습니다.
다음은 11월 18일(수) 안산시근로자종합복지관 대강당에서 안산노동대학 수료축제가 이어집니다. 각 조에서 조별발표를 진행하고, 시상식, 소감 나누기 등을 진행합니다.

